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결국 10월 9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통보하고 150,000명의 병력을 [[튀링겐]] 지역에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즉시 20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에서 작센 방면으로 진군해 10월 10일, 잘펠트에서 [[장 란]]의 제5군단이 프로이센군의 선봉인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태자가 이끄는 군대와 충돌했다.(잘펠트 전투)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패배했고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태자가 전사했다. 잘펠트 전투의 패배와 왕태자의 전사로 기가 꺾인 프로이센군은 철수를 생각했지만 정작 작전회의에서는 철수냐 원군을 기다리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 보냈다. 이런 가운데 [[루이니콜라 다부|다부]]의 군단이 나움부르크를 장악하자 더이상 있다간 포위될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군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철수를 결심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를 승인하여 프로이센군 주력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월 14일,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의 후위부대 약 60,000명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예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40,000명의 프랑스군과 맞닥뜨렸고 나폴레옹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물리친 부대가 프로이센의 본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본군은 아우어슈테트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당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이끄는 60,000명의 프로이센 본군이 다부의 프랑스군 27,000명에게 대파당한 것이다.]] 17일에는 [[할레]]에서 베르나도트의 프랑스군이 뷔르템베르크 공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굳혔다.(할레 전투)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전사하고 가까스로 도망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현재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알다시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소련]] 영토가 되어 [[소련 붕괴]] 후 고스란히 러시아 땅이 되었다.]까지 도망쳤다. 그리고 10월 25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면서 프로이센은 한 가지 굴욕을 남기게 되었는데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처음으로 개선식을 진행한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다.] 그리고 [[포츠담]] 위수 교회(Garnisonkirche)[* 지금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포츠담 [[상수시 궁전]] 끝자락에 묻혀있지만, 당시에는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삼촌의 유언을 씹고(...) 위수 교회라는 곳에 매장했다. 이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불타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를 방문한 뒤 >'''"[[프리드리히 대왕|그]]가 살아있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11월 6일에는 [[마그데부르크]]의 수비대가 항복해 사실상 프로이센 국내의 병력은 동프로이센으로 도망간 일부를 제외한 전군이 무력화되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직후 나폴레옹은 도망가는 프로이센군을 전례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추격했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힌 프로이센군 부대와 그 지휘관들은 곳곳에서 포위된 후 항복했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활약했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도 이때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분석상으로는 프로이센군의 포로만 '''10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멀리 후방에 있었던 약 20,000명의 수비대 만이 호엔촐레른 왕실과 귀족들을 호위해서 동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으로 도피했다.] 삽시간에 프로이센이 패망 위기에 몰리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100,000명의 원군을 급파했다. 나폴레옹은 동쪽으로 도망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러시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폴란드 분할|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3분할된]] [[폴란드]]로 진격했다. 이때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의 동진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기 전에 프로이센과 러시아령 폴란드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민족의 [[해방자]]'로 추앙했다. 1807년 1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임시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월 7일, [[아일라우 전투|아일라우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전투를 치루게 된다.]] 이 전투는 혹한의 눈보라 때문에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국 근위대 정예기병인 기마척탄병 '''11,000기'''를 투입하면서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자 러시아군이 먼저 철수하면서 나폴레옹이 신승했다. 프랑스군은 일단 철수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르페브르가 지휘하는 군대가 3월 18일, [[단치히]]로 쳐들어가 5월 27일 단치히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군도 전열을 재정비한 후 6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하이에스부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싸우기보다는 거점을 타격하는 방식을 택해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했다. 러시아군은 다시 란의 군단에게 전투를 걸었으나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주력군에게 동향이 포착되었고, 6월 14일에 [[프리틀란트 전투|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프리슬란트]]가 아니라 현재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프리틀란트 전투 이틀 후인 6월 16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되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은 마무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